가관친영(假館親迎)
 
 작 성 자  예학사전팀  전자우편  hanjadoc@hanmail.net  등록일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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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신부집이 멀 경우 신부집이 아닌 별도의 처소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방식.
【풀이】신랑이 직접 신부를 맞이해 오는 절차를 친영이라고 하는데, 이때 신랑이 신부의 집이 아닌 별도의 처소에서 맞이해 오는 것을 의미한다.『의례(儀禮)』나『주자가례(朱子家禮)』등에 ‘가관친영(假館親迎)’이라는 용어는 없다. 다만『주자가례』에서 기술된 별도의 처소에서 맞이해 오는 친영 방식을 후대에 ‘가관친영’ 또는 ‘설관친영(設舘親迎)’이라고 하였다.『주자가례』에서 주자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친영의 예(禮)는 가까우면 그 나라에 가서 맞이하고 멀리 있으면 그 관(館)에 가서 맞이한다고 하였다. 주자가 수용한 정자의 설은 본래 중국 고대 국가 제후들의 혼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자는 제후가 모두 친영한 것으로 간주한 선유(先儒)의 설을 반박하며 제후들이 남에게 종묘, 사직을 맡겨두고 국경을 넘은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주자는 이러한 정자의 주장을 수용하여 제후의 혼례뿐만 아니라 사서인(士庶人)의 혼례에서 신부집이 멀 경우까지를 포함해 소개한 것이다. 주자에 의하면 ‘가관친영례’는 첫째, 사위가 처가에서 별도로 마련한 처소를 신랑집 삼아 친영례를 행하는 형식과 둘째, 처가로 하여금 관으로 옮겨와 있도록 한 후 사위가 관으로 가서 신부를 맞아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에 이르러 행례하는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신랑이 먼저 신부를 맞으러 가는 절차를 밟는다는 점에서 친영 본래의 의미에 중점을 둔 것이며, 형식에 있어서는 변례(變例)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 혼인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으로 진행되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절차가 성리학적 질서에 어긋났기 때문에 친영례를 시행하고자 하였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이에 친영례를 강요하는 대신 삼일상견례만이라도 당일상견례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명종대를 전후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당일상견례는 중종대에 서경덕(徐敬德) 아들의 혼인에서 처음 시행된 이후 명종ㆍ선조대를 거치며 조식(曹植)・이황(李滉) 등의 자녀들이 혼인할 때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남귀여가혼의 혼인절차 일부를 수정한 당일상견례가 어느 정도 사족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하자, 이에 고무된 일부 인사들이 좀 더 친영제에 가깝게 하고자 명종대에 명일현구례(明日見舅禮)를 첨가하여 반친영(半親迎)을 주창하였으나 널리 수용되지 못하였다. 명종대 이후 일반 사서인의 혼례는 전통적 남귀여가혼의 절차를 일부 수정하여 당일상견례의 절차를 수용한 남귀여가혼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전기 이래 끈질기게 친영례 시행을 시도하였던 사대부는 친영의 요건 중 당일상견례만을 시행하여, “사정(私情)을 앞세우고 예의는 뒤로한” 삼일상견례의 ‘무례한’ 제도를 고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당일상견의 절차를 수용한 새로운 남귀여가혼은 중종대에 서경덕이 처음으로 시행한 이후 조선 중기를 지나며 신속례(新俗禮)로 널리 수용되었다. 신속례의 성립으로 친영제를 도입하려는 성리학자들의 노력이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예학의 심화와 함께 고례의 시행이 다시 화두로 등장하였다. 거주제(居住制)를 일단 논외로 하는 것은 반친영과 다름없으나, 반친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친영제의 요소를 좀 더 보강하려는 새로운 시도가 인조대 무렵 나타났다. 신랑집과 신부집 사이에 임시로 관소(館所)를 마련하여 혼인의식을 진행한 ‘가관친영례(假館親迎禮)’가 그것이다. 그러나 가관친영례는 의례 자체가 가진 문제와 시행상의 문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어 인조대부터 50여 년간 호서 사림을 중심으로 시도되다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변형된 형태로라도 친영례를 시행하려던 사대부들의 노력조차 중단되고 신속례로서의 남귀여가혼이 조선 후기 혼례의 주류가 되었다. 결국, 조선사회는 건국 이후 왕실부터 일반인의 혼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친영례를 시행하려 진력하였으나, 왕실을 제외한 일반인의 혼례에서는 반친영이나 가관친영 등 변형된 형태의 친영례조차 조선 후기까지 끝내 정착시키지 못하였다.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을 약간 변형한 신속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혼례 후 친정에 머무는 기간이 점차 축소되는 경향은 엿보이지만,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의 끈질긴 잔존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친영’을 시행해야 한다는 조선사회의 강박의식은 친영이라는 용어의 남발을 초래하여 마치 친영혼이 정착된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당일 상견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남귀여가혼 조차 친영이라 부르거나, 일본강점기에 ‘신랑이 신부를 맞이한다’는 어의에만 초점을 맞추어 신랑이 ‘신부 집에 (혼례를 치르기 위해) 가는 것’을 친영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친영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出典】朱子曰, 親迎之禮, 恐從伊川之說, 爲是, 近則迎於其國, 遠則迎於其館. [주자가 말했다. “친영의 예는 아마도 이천(伊川)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가까우면 그 나라에서 맞이하고 멀면 관(館)에서 맞이한다.”.]. * 朱熹『朱子家禮』卷3〈婚禮〉「親迎」.
【用例】㉮ 設館親迎, 是程朱兩夫子之所已行而載之家禮者, 近世諸老先生之所欲行而未遑者. [신랑이 머물 곳을 마련하여 친영(親迎)하는 것은 바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부자(夫子)가 이미 행한 바로『가례(家禮)』에 실려 있고, 근세의 여러 노선생(老先生)께서도 행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행하지 못한 예(禮)이네.]. * 宋浚吉『同春堂先生文集』卷12「答羅于天」. ㉯ 是年春, 先生又行外孫女婚禮於家, 乃使壻權惟主婚而遵行家禮假館親迎之儀, 凡子孫婚娶, 無不用家禮冠婚儀也[이해 봄에 선생은 또 외손녀의 혼례(婚禮)를 선생의 댁에서 행했는데, 마침내 사위 권유(權惟)에게 혼사를 주관하게 하고『주자가례』의 가관친영(假館親迎)의 의식대로 혼인식을 거행하였다. 선생은 무릇 자손들을 장가들이고 시집보낼 때에『주자가례』의 관례와 혼례의 의식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 宋時烈『宋子大全』附錄 卷17「崔愼錄」. ㉰ 兒行今送, 而不能躬往, 私恨. 假館親迎, 禮之大節, 不可苟也[아이를 지금 떠나보냈는데 직접 가지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 한탄스럽습니다. 가관친영은 예의 큰 절목이니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 尹拯『明齋遺稿』卷19「與朴泰輔士元」.
【참고문헌】朱熹『朱子家禮』卷3〈婚禮〉「親迎」.宋浚吉『同春堂先生文集』卷12「答羅于天」. 宋時烈『宋子大全』附錄 卷17「崔愼錄」. 尹拯『明齋遺稿』卷19「與朴泰輔士元」. 장병인「조선 전기 국왕의 혼례형태-假館親迎禮의 시행을 중심으로」『한국사연구』140 2008. :「조선전기 혼인의례와 혼인에 대한 규제」『조선 전기의 혼인제와 성차별』일지사 1997. :「조선중기 사대부의 혼례형태」『조선시대사학보』45, 2008 :「조선중기 혼인제의 실상」『역사와 현실』58 2005. 박혜인『한국의 전통혼례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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